1-9 대조 III: 희망계 - 그래도 희망을 품자
나이 먹을수록 세상은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님을 깊이 깨닫게 된다. 어려움을 겪다가 도움을 받아 회복되면 더 그렇다. 점과 선 시즌 1의 프로그램 대부분이 두 악기에 의한 작품들이지만 오늘 '희망계'의 작품은 대화의 성격이 좀 더 강하다. 대화는 공감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여성에게 인기 없는 남성은 대개 대화에 약점을 갖고 있다. 나름 대화를 한다 생각하지만 상대방은 전혀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여성이 먼저 말을 꺼내면 남성은 문제를 파악하여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자신의 책무이자 상대에 대한 최선이라 생각한다. 그저 잘 들어주고 고개 끄덕이며 공감해 달라는 건데 선은 이렇고 후는 이러니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 라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현실의 연애는 어땠을지 모르나 오늘의 작곡가들은 이런 점을 잘 파악한 듯 하다. 음악적으로야 듀오가 아닌 3성부로 진행하는 트리오의 형식(바흐)을 취하고, 당대의 '표준'과 달리 느린 악장과 스케르초의 순서를 바꾸고 4악장으로 확장(슈베르트)하는 진보를 이루었음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정작 듣는 이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대등한 위치에서 서로에게 얘기하고 공감하고 함께 길을 나아가는 다정한 모습이다. 100여 년의 시차 때문인지 이 세 커플의 대화가 어투에서는 차이가 난다. 바흐의 경우는 '~하오' 체다. "그대의 고통을 이해한다오, 아 정말 그러신가요, 마음 속 슬픔 다 내려 놓으시오, 감사해요 하지만 시간을 너무 뺏는 게..., 내 손을 잡으시오 함께 일어나십시다" 대충 이런 느낌이다. 교회 소나타의 형식을 취하되 두 악기의 균형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는 '웃픈 대화'이다. 장조로 빠르게 진행하는데 정작 대화의 내용은 기쁘기만 한 게 아니다.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힘들었던 시간을 별일 아니라는 듯 풀어놓는 친구, 이런 느낌이다. 안아주고 싶어진다. 천재 모차르트의 눈물이란 게 바로 이런 거다. 내일은 더 나아질 거야,를 B플랫 장조로 가볍게 외치지만 그 뒤엔 간단치 않은 세월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대등한 대화란 측면에서 슈베르트의 '듀오'는 백미라 할 만하다. 한 쪽이 다른 쪽을 이끌기 보다는 상대에 대한 예우와 배려 속에 우아한 어조로 대화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연대 순에 의한 프로그램이라 해도 마지막에 슈베르트가 있는 편이 희망의 노래를 마무리하는 측면에서 적절하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야, 아니래도 또 다른 내일이 있으니 절망하지 말자고. 아티스트가 이 세 곡을 들려주는 것은 듣는 이들과 희망의 대화를 나누고자 함이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1685-1750): 바이올린과 하프시코드를 위한 소나타 3번 E 장조, BWV 1016
I. Adagio 느리고 침착하게
II. Allegro 빠르게
III. Adagio ma non tanto 느리고 침착하게 하지만 지나치지 않게
IV. Allegro 빠르게
1번과 4번에 가려 주목도가 덜하지만 3번 소나타, 특히 두 아다지오 악장의 아름다움은 두 눈 감고 고개를 숙이게 할 정도로 깊이가 있다. 오죽하면 아버지를 따라 작곡가의 삶을 살던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가 "아버지 바흐의 바이올린 소나타들에 있는 아다지오 이상으로 훌륭한 노래가 오늘날 작곡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겠는가. 비슷한 시기에 작곡된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가 열정이 넘친다면 이 곡들에는 지적인 힘이 강하다. 교회소나타의 전통을 따라 느리게-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네 악장 구성이고 대위법의 구사가 강하지만 독주-반주의 형식을 가미해 바로크 소나타의 테두리를 벗어나고 있다. 이 점에서 바로크와 고전의 다리 역할을 볼 수 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 바이올린 소나타 26번 B플랫 장조, K.378
I. Allegro moderato 조금 빠르게
II. Andantino sostenuto e cantabile 의도적으로 안단테보다는 조금 빠른 속도를 충분히 유지하며 노래하듯이
III. Rondo. Allegro 론도. 빠르게
어머니를 떠나 보낸 이듬해에 작곡된 곡이다. 21번 소나타와 함께 중기 모차르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우아하고 경쾌한 흐름 속에 21번 K.304와는 결이 다른 슬픔이 내재되어 있다. B플랫 장조와 F장조로 시작하는 주제가 G단조, F단조로 옮겨가 코다로 나아가는 1악장이 그렇고, 노래하듯 나직하게 읊조리는 2악장이 그렇다. A-B-A-코다의 3악장에서 분위기가 바뀐다. 밝고 화려하다. 중간에 슬쩍 G단조로 진행되는 부분은 지난 시절을 반추하는 모습인데 이내 "그래서, 뭐 어쩌자고?" 되묻는 듯한 낙관적이고 적극적인 작곡가의 태도로 곡이 마무리된다.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 바이올린 소나타 A 장조, D.574 '듀오'
I. Allegro moderato 조금 빠르게
II. Scherzo: presto 스케르초: 매우 빠르게
III. Andantino 조금 느리게
IV. Allegro vivace 매우 빠르고 생기있게
가곡의 왕 답게 아름다운 선율이 매력적이다. 1악장의 도입은 스무 살도 안된 청년의 것으로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을 정도의 느긋함과 우아함이 서려있다. 그리고 한없이 깨끗하다. 리듬의 완급 또한 절묘하다. 세 개의 소나티나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놀라운 발전을 이루어냈다. 연속되는 스타카토로 시작하는 스케르초 악장은 유쾌하고 변화무쌍하다. 여기서도 레가토의 활용을 통해 리듬에 완급을 주어 한 가지로 규정되지 않는 그림을 그려낸다. C장조-A플랫 장조-C장조로 흐르는 3악장은 주제와 3개의 변주로 구성되었다. 역할을 주고받다 한 목소리를 내기도 하는 두 악기 덕에 안온한 가운데 입체적 느낌이 유지된다. 느린 흐름 속에서도 솜씨있게 변화를 가져가는 작곡 능력이 대단하다. 4악장에서는 이전에 비해 단호한 목소리가 자주 등장한다. 주제의 연관성으로 2악장과 닿아있고 조성의 변화를 활용하는 점은 직전 악장과 마찬가지다. 20분 가까운 대화에서 결론을 얻었다는 듯 둘은 곡을 즐겁게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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